정치가 소소한 일상부터 국제사회의 미래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많은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처럼 인류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이 이루어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정치공학적 유불리를 계산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생존수단이기야 하지만,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제3의 성찰은 정치지리학자이자 통일부장관이었던 정치인이 독일을 보며 제시하는 한반도의 청사진이다. 제목만 보면 통일인가 싶어서 그다지 바로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용 전반에서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야한다는 외침이 구구절절하게 녹아있다. 교육현장에서도 통일교육은 교과를 넘어 다루어야하는 중요한 주제로 강조되고 있다. 다만 진로교육, 인성교육, 안전교육, 성교육, 환경교육, 인권교육 등 그만큼 강조되고 있는 주제가 여럿이다보니 주의가 분산될 뿐이다.
통일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통일교육을 나름대로 하면서도 내심 부족하다고 느꼈던 점들이 있다. 북한이해교육이 남북한 집권세력에 대한 이해가 아닌데, 공산주의 사상의 특징이나 김일성 독재체제의 형성에 맞춰진 느낌이다. 실제로는 통일이 헌법에 따라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하는 사안임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다루기는 힘들다. 자원을 값싸게 가져오고 제품의 판매시장이 늘어난다는 식민지적 발상으로만 접근하는 수준의 강사를 보며 모든 문제를 손익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천박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상당히 공감하는 내용이 여럿 나올 때마다 반가웠다. 통일 정책은 정파를 넘어 서로 합의된 일관된 원칙에 따라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지지해야만 한다. 남북한의 주민과 남북한의 정권을 구분하여 생각해야하며, 북한 주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일이 이루어져야한다. 통일 이후 북한 국영기업과 자산 등은 북한 주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한다. 단일한 정치체제로 통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며, 분단기간 이상으로 통합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분단비용은 작아보여도 꾸준히 계속되지만 통일비용은 커보여도 끝이 있다. 통일은 당면한 과제이며 미룰 수 없고 현상유지도 분단의 영속화에 기여한다. 당장 대외적 여건이 어려우면 기금조성 등 통일을 위한 준비라도 철저하게 해야한다. 한반도는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상황임을 명심하고 의사결정을 해야한다. 통일 과정에서는 남한에 대한 중국의 신뢰가 크게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한반도 통일은 동북아시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구구절절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느낌이 들어 시원했다.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정치인들의 생존 전략이다. 남북한의 주민들은 서로 무력 충돌하지 않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향이라면 반대할 까닭이 없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 뿐만 아니라 북한지역의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혜적 태도로 접근해선 곤란하다. 격차에 따라 커지는 통일비용을 미리 줄이는 과정이기도 하고, 통일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미리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박탈감과 상실감은 통일 이후에 더 문제가 된다. 젊은 세대로부터 점차 통일에 대한 관심도 이해도 낮아지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한반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할지 치열하게 논의해야만 한다.
책의 구성이 대담에 생각에 강연문이 섞인데다, 독일어판과 한국판이 나오느라 어색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고위급 정치인이라 곳곳에서 정치적 주장이 툭툭 튀어나온다. 이승만, 586운동권 등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저자의 정치적 견해에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부분은 이명박 정부의 정치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독립운동가의 마음가짐으로 통일문제에 대해 간절하게 임하는 모습은 높이 평가한다. 미국과 중국을 중요하게 두고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반도 관계를 살펴보는 시각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공간적인 관점과 시간적인 관점을 중심에 두고 설명하는 방식에서 지리학자가 가지는 역량이 드러나서 좋았다. 해뜨기 전이 제일 춥다거나 태평양의 태풍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곳곳에 들어가 있어 그런 표현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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