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뿌직뿌직

평화의 지정학

by Thisis Geoedu 2021. 5. 12.

정치지리는 가까이 있지 않았다. 도시지리나 지형학은 필수 과목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지리학의 침체기를 맞이하는 거대한 국면에 정치지리가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지리의 수명이 끝난 것은 아니라서, 최근에 다양한 정치지리적 접근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영토나 국경에 대한 오래 전 이론들을 접한 이후로 처음이라 신선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정치지리학이 익숙하다보니 지정학도 지리학의 하부 학문인 정치지리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다 지정학적 갈등을 수업하려다보니 결국 지정학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학습자료를 만들다가 스파이크맨의 저서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매했다.

평화의 지정학에는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이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라 치열하게 다투는 그 와중에 이러한 책이 쓰였다는 사실도 놀랍고, 세계의 정치 지형을 중심으로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분석하는 관점이 맞아들어간다는 점이 더 놀랍다. 게다가 강의노트라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는 점은 신기하고, 요절한 학자의 마지막 강의를 유고집으로 펴낸 것이라 더 신기하다.

이 책이 탁월한 부분이 있는데, 특히 앞부분에서 지도를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지도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야말로 세계관을 드러내준다. 지도학에 대한 내용도 알면 좋겠지만, 최소한 지도에는 의도가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입장에 따라 그 입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주어서 고맙다.

또 탁월한 점은 오래되었지만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고전이라는 것들이 대체로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정학 분야의 고전으로 꼽아도 좋을 것 같다. 강대국과 이웃하고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국가의 경우, 스스로의 안전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이웃 국가가 강력해지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양 진출을 통해 힘을 얻고 정치적 동맹을 통해 이웃 국가의 힘을 최소화하여 위치로 인한 위험을 완화해야한다는 내용에는 한미동맹을 미리 제시한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탁월한 점은 얇다는 점이다. 풍부하고 자세한 책도 좋지만, 간결하고 깔끔한 책도 좋다. 시인들은 표현을 고르고 고르며 짜낸 결과물로 시집을 만든다는데, 학자들이 쓰는 시집이 있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싶은 얇은 책들도 있었다. 이런 책이 번역되어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원제가 The Gegraphy of the Peace니까 평화의 지리학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뿌직뿌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도력  (0) 2021.07.28
네모에 담은 지구  (0) 2021.07.07
처음 읽는 인공위성 원격탐사 이야기  (0) 2021.05.10
인구의 힘  (0) 2021.05.09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0) 2021.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