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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직뿌직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by Thisis Geoedu 2021. 2. 24.

아마 어린 시절 교과서 구석의 읽기 자료였던 것 같다. 자신의 할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네댓 줄 짜리 간략한 내용이었다. 삽화가 기차에 탄 사람으로 그려져 있어, 기관사도 그럼 살인의 책임이 있는 것인지 잠깐 고민했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다'라는 복무신조를 매일 외쳤다. 중위는 꼭 그걸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로 고치곤 했다.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할 장교의 명령을 복종해야하나 싶었다.

딱 그 정도였다. 말로 말을 만드는 복잡한 딜레마 상황은 귀찮았다. 그간 아우슈비츠, 하바라 협정, 바르샤바 게토 봉기, 뉘른베르크 재판 등 지식은 조금 늘었다. 하지만 깊이는 여전히 안네의 일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다 더 리더를 보게 되었다. 엔딩을 보니 불현듯 떠올라 책을 샀다. 하지만 미루고 미루다 방학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대인 학살의 전후과정이 드러난다. 읽는 중간 중간 놀랄 일이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의 학살이 어떻게 그렇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이루어졌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납득이 되었다. 물론 아이히만이 기관사가 아니기도 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아이히만이 시오니즘을 존중했다는 점이었다. 소개와 이주를 전문으로 하는 이상주의자였던 셈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게토로 순순히 이동한 것처럼, 아르헨티나에서도 순순히 납치되었나보다.

세상 모든 지식을 레고 블럭처럼 쌓아 철학자들은 작품을 만드는 것 같다. 시오니즘과 반유대주의에서 나아가 아르메니아와 크라프 카셈으로 확장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비슷하지만 다른 사례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가치관의 방향타를 잡게 도와준다.

이미 반세기 전에 나와 고전이 되어버린 책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결국 맥락이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얘기를 하듯, 백가쟁명은 춘추전국시대를 반영하고, 미국 철학자는 미국 이야기를 한다. 풍부한 맥락이 곧 지리와 역사이며, 인문학의 출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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