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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기의가 된다. 남북한의 첨예한 갈등 속에서도 한반도기는 정치 이념과 무관한 국토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근대 국가는 대부분 그렇다. 영토가 있기에 그 것을 표현한 지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사실은 지도가 있기에 그러한 영토가 되는 경우도 많다.
지도에서 태어난 태국은 전근대 왕조국가인 시암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영토를 가진 근대국가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솅겐조약이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국경은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영토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상황은 꽤나 생소한데, 호족과 조공이 결합된 형태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친숙했다. 힘은 중앙에만 미치고, 주변부의 점이지대에 해당하는 메콩강 좌안은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었다. 근대적 측량과 지도를 두려워했던 시암 왕실은 조공국을 관리하고, 직할지를 늘려가며 근대적인 국경으로 자리잡을 준비를 했다. 타이에 대해 무지하여 대나무 외교를 통해 영토를 할양하며 독립을 지킨 쭐랄롱꼰의 업적 정도만 생각했다. 지역 패권국의 역사가 위대한 반식민주의 역사로 둔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통적 지도와 세계관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영호남연해형편도나 정화항해도처럼 스트립맵 형태의 지도도 있는 것 같고, 불교를 중시하는 타이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대동여지도나 천하도 형태의 지도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함포외교를 당했다는 측면에서 1893년의 빡남사건이라는 짜오쁘라야강 봉쇄는 근대 강화도나 구로후네가 떠올랐다.
지리체Geo-Body라는 개념으로 역사를 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도제작은 지리체에 앞서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지리체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며, 조공국의 진압은 내부 문제인지 국제 문제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국민국가로 태어나지 못한 군소국의 로컬 관점이 소거되면 수도의 관점만 남는다는 점에서도 시사점이 많다. 타이다움이 지리학과 역사학의 연구 대상이라는 점에서, 타이가 지도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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