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만화책을 정말 좋아했다. 수염이 날 무렵부터는 배를 깔고 누워 대하소설을 읽었다.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임꺽정, 객주, 혼불 등 시작을 하면 끝까지 헤어나올 수 없었다.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시기가 꽤 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직장인이 되고 십 년이 지나 게임도 잘 하지 못하고 책도 별로 읽지 않는다. 그런 형편이니 문학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럽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경사라며 기사가 나오는데 한강 작가의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한켠에 두 칸 짜리 책꽂이를 두고, 학급문고라고 이름을 붙인 교실이 있었다. 아마도 학급 담당 교사의 성품이 담겨있을 터이다. 눈에 보이게 채식주의자 책이 놓여있었고, 분명 학생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지만 염치없게도 수업하러온 내가 꺼내갔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에 오해하였기 때문에, 처절하게 육식을 선호하는 평소의 식습관을 반성하게 되려나 걱정했다. 작품의 본질은 채식주의의 정당성 호소가 아니었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글이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유부남의 입장에서 감정을 느끼다보니 소설인 것을 알면서도 민망하고 당혹스러운 서사에 깜짝깜짝 놀랐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의 현대 소설이지만, 세월의 흔적에 새삼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폴더를 닫는다. 2000년대는 피처폰을 사용하던 시대였고, 폴더나 슬라이드 형태였다. 폴더를 닫는다는 표현은 전화를 끊는다는 표현의 다른 형태였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 다시 폴더 형태의 전화를 쓰고 있다.
작품이 전하려는 문제의식은 잘 모르겠다. 문장의 유려함을 평할 수 있을만한 안목도 없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들어만 봤던 작품을 그래도 읽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부끄러움이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