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능력주의 신념을 가진 학생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가보다 하면서도, 다만 모든 사람이 유능한 신체를 가지는 것으로 가정하는 사고방식에 동의하기 어려울 뿐이다. 사실 모든 인구 집단은 다양한 기간 비생산적이고 자기 부양을 하지 못하는 구성원을 가지고 있다. 자본, 젠더, 민족의 담론은 그래도 익숙하지만, 지리학의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은 익숙하지가 않다.
장애의 지리학은 공간적 억압으로부터 장애를 해방시키려는 이야기이다. 장애는 사회가 장애를 결함이 되도록 사회공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점에서 명쾌함이 느껴졌다. 르페브르의 논의를 적용하여 가정, 일터, 시설의 세 공간으로 정리한 부분도 간결하여 인상깊었다.
전근대에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도 배제되지 않는 생산과정이 있었고, 구빈원조차도 전적으로 공적인 자선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면서 신체 결함의 도시사회공간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도시에서 장애에 대한 억압을 분석하고 탈장애 공간을 위한 정책적 대응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장애를 공공의 영역에서 돌릴수록 가족의 여성 노동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봉건 잉글랜드와 근대 멜버른과 현대 더니든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에서 저자의 특성이 드러났다. 시설의 공간적 특성으로 격리에 주목하였고, 도시에 접근할 권리의 측면에서 이동권을 언급했다. 특히 현재의 대중교통 체계를 배타적 버스 시스템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 신선함이 느껴졌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는 주제와 닿아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에 쓰여진 책을 이제야 접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마저 생겼다.
역사지리적인 맥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남반구의 맨체스터라고 불리던 멜버른의 모습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었다. 전근대 시대에도 한센병처럼 전염성을 가진 진행성 질병은 다른 신체적 결함과는 달랐으며, 마을에서는 반드시 환자를 내쫓았다는 점에서 격리도 세분화하여 살펴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장애인 복지 정책을 알 수 없는 집단의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하여 납세자에게 비용 부담을 지우는 행위로 바라보기 때문에 초래된 어려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시공간의 생산, 장애의 경제지리, 여성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의 역할, 시설의 지리 등 장애의 지리학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다. 그간 우리나라의 지리학에서는 장애에 어떤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해졌다. 한편으로는 특수교육이 강한 대구대학교의 학풍 덕분에 이제라도 장애의 지리를 다룬 번역서가 나올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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