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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직뿌직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Thisis Geoedu 2020. 10. 11. 23:05

공장.

인생의 여러 경험과 함께 가는 단어이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십년 전 부산 사상공단 끝자락의 주택에서 삶을 시작했다. 광주의 타이어 공장은 어린시절 생계의 원천이었다. 화성의 플라스틱 공장, 털걱거리는 사출기 소음 틈에서 전공도서를 읽으며 학비를 마련했다. 군산국가산단으로 가는 언덕 너머, 근로자아파트와 원룸 가득한 동네의 학교에서 교단에 섰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산업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이 산업 고도화에 이르면, 제조업은 마치 스러져야할 운명처럼 담백하게 다루어진다. 하지만 군산에서 근무하던 시절,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정확히는 GM)가 빠져나가며 학급에서도 전학생들이 생겨났다. 교과서 속 분공장과 다국적기업은 그렇게 교실로 들어왔지만, 정작 감정은 들어오지 못했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수도권의 잘난 언론들은 비용과 편익을 항상 이야기하지만, 그 숫자들 모두가 사람이고 삶이라는 점은 와닿지 않았다.
지리 수업에서는 필연적으로 산업을 다룬다. 하지만 기출문제를 풀어주다보면, 어느새 특징 몇 가지로 요약된 암기 지식만을 나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자꾸 수업에서는 실제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점점 빠진다. 정말이지 괴롭고 답답한 순간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사람 냄새가 나는 책이다. 그래서 더 가치있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연구자가 직접 참여관찰한 인류학 서적이기도 하고, 조선산업의 변화를 다룬 경제 서적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거제의 삶을 다룬 인문지리 서적으로 느껴진다.
사실 조선산업의 메카 거제는 아주 낯선 소재가 아니다. 주머니 얇은 대학 시절 답사로 거제까지 와서 현지 물가에 놀랐고, 한가지 산업에 특화한 번영이 얼마나 위험한지 밤 늦게까지 얼큰하게 취해 토론하곤 했다. 산업 기술의 축적을 다룬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다른 지리 선생님과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거제는 잘 나가던 시절에도, 힘든 시절에도 자극적으로 오르내리던 소재였다.
그런 익숙한 소재를 저자가 아주 잘 살렸다. 인문사회계열로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꼭 권하고 싶을 정도의 책이다. 책을 읽고 나니 산업을 가르칠 때 좀 더 사람 냄새가 나는 수업을 구성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실리콘밸리와 둥관에도, 구로와 김포 양촌에도 일자리와 삶이 있다는 맥락을 가르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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